서펜타인 미술관에서 파빌리온을 계획하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건축을 매개로 하여 예술과중을 좀 더 가깝게 만들고자 함이다. 매년 수십만 명이 찾는 미술관일지라도 그곳에서 전시된 현대미술은 여전히 일반 대중과 일정 정도 거리가 있다. 따라서 파빌리온을 활용하여 좀 더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을 끌고, 이를 토대로 미술관으로 발길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약 3개월 동안 설치하는 파빌리온에서는 전시, 영화 상영, 세미나, 토론 등의 다양한로그램과 이벤트가 벌어진다. 물론 누구나 제한 없이 관람하고 참여할 수 있다. [문화관광연구원 200803]
김정후
런던은 지금 진화중
흔히 도시는 진화한다고 말한다. 더욱 정확히 표현해야 할 점은 도시는 스스로 진화하지 않고, 인류의 노력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시는 생명체와 같이 스스로 진화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도시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활발하고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런던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원칙적으로 경제적 측면이 가장 중요하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사회적 측면이다. 사회적 측면의 원동력은 바로 끊임없는 ‘이벤트’와 ‘프로그램’ 개발이라 할 수 있다. 앞선 글에서도 강조했듯이 런던은 다른 유럽 도시들과 비교하여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창조적 이벤트와 프로그램이다.
런던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공통된 의견이 있다.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다양하다는 점과, 상상했던 것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점이다. 첫째는 런던 시내 도처의 크고 작은 박물관과 미술관의 전시와 뮤지컬, 연극, 연주회 등의 다양한 공연과 행사 때문이다. 둘째는 화려한 고전 건축과 중세 모습이 철저하게 보존된 도시들에 비하여 런던은 현대적 느낌이 강하므로 감동이 덜하다는 뜻이다.여기서 주목할 점은 처음 의견이다. 명실 공히 유럽 최고의 관광도시라 할 수 있는 파리와 바르셀로나는 건축과 도시의 아름다움이 그 핵심이다. 그러나 런던은 다르다. 런던은 건축과 도시의 아름다움에 기대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 이벤트, 프로그램 개발을 통하여 도시 진화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각기 다른 성격의 주목할 만한 두 곳이 있다. 서펜타인 파빌리온과 웸블리 스타디움이다. 두 곳은 기능, 성격, 규모 등 모든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새로운 이미지를 통하여 21세기 런던의 진화에 일조하고 있다.
건축을 통한 예술의 대중화, 서펜타인 파빌리온
켄징턴 가든 내에 위치한 서펜타인 미술관은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앤디 워홀, 헨리 무어, 만 레이, 루이 부르주아 등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빛나는 별 같은 작가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이곳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서펜타인 미술관은 서유럽의 현대미술 담론을 주도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지역 미술관임에도 한 해 평균 80만 명이 찾는다고 하니 서펜타인 미술관의 위치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런데 서펜타인 미술관이 일반 대중을 포함하여 문화예술 분야의 폭넓은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부터다. 미술관 옆의 잔디마당에 매년 여름이면 서펜타인 파빌리온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하기 때문이다.
미술과 건축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 시도인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지난 7년 동안 명실 공히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이 디자인했다. 첫해에 자하 하디드(2000)를 시작으로 다니엘 리베스킨트(2001), 이토 도요(2002), 오스카 니마이어(2003), 알바로 시자와 에두아르도 수토 드 무라(2005), 렘 쿨하스(2006), 올라퍼 엘리아손(2007)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당연히 예상할 수 있듯 이들에 의하여 해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건축가로서는 특별한 제약이 없는 임시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일반 건물 디자인에 비하여 훨씬 적극적이고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 미술관의 책임자인 줄리아 페이톤 존스에 따르면 작가들에게 일반인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고 한다. 이를 위하여 구조와 미술 등 연관분야의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토대를 동시에 제공한다. 예를 들어서 세실 발몬드 같은 세계적인 구조 전문가의 도움은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창조성을 구현하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서펜타인 미술관에서 이와 같은 파빌리온을 계획하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건축을 매개로 하여 예술과 대중을 좀 더 가깝게 만들고자 함이다. 서펜타인 미술관이 매년 수십만 명이 찾는 미술관일지라도 그곳에 전시된 현대미술은 여전히 일반 대중과 일정 정도 거리가 있다. 따라서 파빌리온을 활용하여 좀 더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을 끌고, 이를 토대로 미술관으로 발길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약 3개월 동안 설치되는 파빌리온에서는 전시, 영화 상영, 세미나, 토론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벌어진다. 물론 누구나 제한 없이 관람하고 참여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프로그램과 이벤트 역시 파빌리온을 디자인한 작가들이 함께 기획함으로써 기존의 형식적인 틀을 깨고 있다. 주요 행사가 없는 동안에는 켄징턴 가든과 서펜타인 미술관을 방문한 사람들을 위한 카페와 휴식공간으로 사용된다.
두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지난 2002년에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가 디자인한 파빌리온은 일반적으로 건축에서 사용되는 수직, 수평의 형태와 구조 원리에서 벗어나 시각적으로 기둥이 없는 정방형의 자유로운 구조체를 선보였다. 마치 기하학적 구성의 조각품처럼 보이는 이토 도요의 파빌리온은 불규칙한 창을 통하여 켄징턴 가든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짐으로써 독특한 감흥을 선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파빌리온은 템스 강변의 배터시 화력발전소(현재 복합 문화시설로 공사 중인) 옆으로 이동, 설치되어 현재까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2006년에 렘 쿨하스가 디자인한 파빌리온은 열기구를 닮은 구조체다. 앞서 설명한 이토 도요의 파빌리온과는 정반대로 렘 쿨하스의 파빌리온은 다분히 폐쇄적인 모습이다. 기본 형태는 메탈과 플라스틱으로 원형의 전시공간을 만들고 달걀 모양의 기구를 지붕처럼 그 위에 얹어놓은 모습이다. 그런데 이 기구는 헬륨과 공기로 채워졌고, 온도 변화에 따라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건물인 셈이다. 렘 쿨하스 파빌리온의 아름다움은 밤이 되면 드러난다. 내부 조명으로 빛을 발하며 솟아올라서 미술관과 켄징턴 가든 일대를 압도한다. 멀리서 보면 미술관 뒤편으로 떠오른 달처럼 보이기도 한다. 렘 쿨하스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초청하여 밤새 진행하는 24시간 마라톤 인터뷰를 직접 기획하고 참여하기도 했다.
7년이 지난 지금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서펜타인 파빌리온을 관람하는 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는 관광객뿐만이 아니다. 매년 봄이 지나면서부터 작가 선정에서부터 공사 과정까지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문화, 예술, 사회 등 여러 분야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킨다. 조만간 2008년 서펜타인 파빌리온에 대한 열기가 뜨거워질 것이다.
축구 종가 영국의 자존심 웸블리 스타디움
올여름에 개최될 베이징 하계 올림픽을 위한 성화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3월 15일에 점화될 예정이다. 이후 성화는 전 세계 5개 대륙의 서울을 포함하여 23개 주요 도시들을 순회한다. 런던에는 4월 6일에 도착 예정인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런던에 도착한 성화가 최초로 향하는 장소가 어디인가다. 성화가 각각의 도시에 도착하여 점화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중계되므로 도시 홍보의 측면에서 올림픽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첫 번째 장소는 두말할 필요 없이 그 도시의 가장 상징적인 곳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서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는 세계 3대 테니스 대회 중 하나인 윔블던 대회가 열리는 윔블던 주경기장이 사용되었다. 적어도 당시까지는 런던을 대표하는 스포츠 시설이라는 점에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 런던에 도착한 성화가 최초로 향하는 곳은 바로 지난해 새롭게 개장한 웸블리 스타디움이다. 런던 나아가서 영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스포츠 시설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런던의 북서쪽에 위치한 이곳에는 본래 1923년에 건립되어 영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전용구장이자 유럽의 중요한 경기들을 위하여 사용되었던 엠파이어 스타디움이 있었다. 당시에도 8만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었다. 또한 1948년에 열린 런던 하계 올림픽의 주경기장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엠파이어 스타디움은 1970년대 중반부터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와 자선공연을 위한 시설로 적극적으로 활용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따라서 엠파이어 스타디움은, 물론 각종 기반시설이 노후하긴 했지만 지난 80여 년 동안 런던을 대표하는 스포츠와 공연 시설로 여겨졌다. 따라서 새로운 밀레니엄에 접어든 지난 2000년에 9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유럽에서는 두 번째 규모) 경기장으로 재건축하기로 결정했고, 지난해 비로소 완공되었다. 새로이 완공된 웸블리 스타디움은 기존 엠파이어 스타디움의 역할을 그대로 계승하여 스포츠와 종합 공연을 위한 무대로 디자인되었다.
웸블리 스타디움과 같은 국제적 규모의 경기장 건립은 이미 순수한 스포츠 시설의 역할을 넘어선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지리학자 앤드루 손리는 이 같은 경기장 건립은 도시재개발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의 성격이 더욱 강함을 지적한다. 웸블리 스타디움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웸블리 스타디움이 위치한 런던 북서쪽의 브렌트 지역은 고속도로와 바로 이어져 전통적으로 물류 창고와 대형 마켓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그러나 1990년대이후 이 지역의 상황은 점차 낙후되거나 정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웸블리 스타디움의 재건축은 브렌트 지역의 재개발을 위한 경제적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측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측면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 경기장은 디자인의 성패에 따라서 한 도시, 나아가서 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로까지 자리 잡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웸블리 스타디움은 어떨까?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노먼 포스터가 디자인한 이 경기장은 재료 사용, 형태, 구조 등에서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하이테크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경기장 자체만 놓고 보면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포스터의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경기장의 지붕 위에 설치된 독특한 모습의 ‘아치’ 때문이다. 이 아치는 케이블로 지붕과 연결하여 약 5,000톤 가량의 지붕 하중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적 목적에서 고안된 혁신적 방법을 택했다.
구조적 기능과 별개로 아치는 미학적 측면에서 훨씬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떤 경기장이건 간에 이 정도 규모의 경기장은 일정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만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웸블리 스타디움 아치의 효과는 대단하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곡선으로 솟아오른 듯한 모습의 아치는 다분히 밋밋한 모습의 경기장 이미지를 일순간에 역동적으로 바꿔놓았다.
68도 기운 아치는 높이 133m, 전체 길이 315m의 거대한 단일 구조체다. 이러한 높이와 규모 덕에 아치는 런던 북서쪽 일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시야에 들어온다. 또 보는 위치에 따라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무지개처럼 보이는가 하면, 기존의 수직적인 건물들과 대비되어 전혀 다른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낸다. 해가 지면 아치의 진가가 더욱 두드러진다. 아치에는 258개의 할로겐 전구가 설치되어서 강한 빛을 주변으로 발산한다. 이 정도로 강력한 이미지의 야경을 연출하는 구조물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을 듯싶다. 따라서 웸블리 스타디움의 아치는 그 자체로 런던의 어떤 고층건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강력한 시각적 랜드마크임이 틀림없다.
* 본 원고의 저작권은 문화관광연구원 및 김정후 도시건축정책연구소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