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이 넘게 공사 중이라니! 그런데 <성가족 성당la Sagrada Familia>에 다녀온 사람은 누구나 완공을 위하여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주변에 자재가 잔뜩 쌓여있고, 관계자들이 왔다 갔다 하지만 건물을 완성하기 위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 건물의 완성에 회의적인 생각까지 든다.”―본문 24페이지에서
감히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던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성당〉을 《유럽 건축 뒤집어 보기》는 다르게 본다. 지금까지 유럽 건축은 하나같이 소개와 찬양의 대상이었다. 화려한 건축물, 찬란한 문화유산 등 영화에서 보이는 ‘감성의 유럽’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제 ‘이성의 유럽’을 바라볼 때다. 유럽은 낭만적인 감성 이면에 합리적인 사회를 만든 냉철한 이성이 살아 숨 쉬는 땅이다. 집과 거리를 보면 그 이성이 보인다.
런던 최악의 건물은 무엇일까
유럽이라고 멋지고 착한 건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런던에는 분명히 고풍스럽고 근사한 건물이 많지만 ‘못난이’ 빌딩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화염으로 상처 입은 도시를 재건reconstruction하면서 기능적인 사무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선 세계 금융의 중심지 런던. 1980년대 도시 재생regeneration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무미건조한 사무 빌딩, 버스 터미널 등이 사람들의 눈 밖에 나기 시작한다. 2006년 철거된 〈넘버 원 웨스트민스터 브리지 빌딩〉이 대표적이다. 도심 한복판에 아무런 장식 없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6층 건물의 내부는 사무실, 복도, 계단, 화장실의 연속이었고 흉가처럼 20년이나 방치되어서 택시기사들도 이곳을 피해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완공 당시 초고층 최첨단 빌딩이었던 〈세운상가〉가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 근대 건축의 자랑이라고 했건만, 이제 거의 흉물이 되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을 배려하지 않은 건물은 오래가기 힘든 법이다.
유럽은 맥도날드와 전쟁 중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글로벌 외식업체 맥도날드. 한 푼이 아쉬운 배낭여행 족은 유럽에서 만나는 맥도날드가 사막의 오아시스보다 반가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풍스런 건물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도시에 새빨간 원색을 사용하는 맥도날드의 커다란 간판과 매장은 너무 튄다. 판매하는 음식도 감자튀김 따위로 몸에 좋지 않으니 유럽에선 환영받지 못한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유럽의 맥도날드는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노르웨이 크리스티안산드의 맥도날드 매장은 그리스의 신전처럼 생겼다. 간판에는 단색의 McDonald’s 글자만 얌전히 올려놓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맥도날드는 마치 보석상 같다. 기존 고전 건축물에 들어선 모습이 주변과 비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맥도날드가 있으면 발전된 도시라는 등식은 과연 타당한가? 패스트 푸드로 세계인의 입맛을 ‘하향평준화’한 맥도날드는 패스트 건축으로 세계의 도시도 ‘하향평준화’하고 있는데 맞서 지금 유럽은 맥도날드의 수준 낮은 음식, 획일화된 매장과 전쟁 중이다.
화력발전소에서 세계 최고의 미술관으로
템스강변의 〈테이트 모던〉은 2000년 이후 런던에서 아시아인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이다. 이 미술관은 원래 96미터의 굴뚝에서 과거 영국 근대의 상징인 연기가 쉴 새 없이 피어오르던 화력발전소였다. 80년대 초 유가 파동으로 가동을 중단하고 버려졌던 화력발전소가 외형은 그대로 유지하는 리모델링을 거쳐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지난 달 국내 최초이자 서울의 유일한 발전소인 서울화력발전소(당인리 발전소) 개발 계획이 발표되었다. 〈테이트 모던〉과 유사한 사례다. 우리 도시의 재생을 생각하는 독자는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어떤 방식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를. 유럽을 무조건 따라하자는 것은 아니다. 환골탈태에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 책 속에 답이 있다.
영국에는 교통경찰이 없다?
영국의 보행자는 신호등이 빨간 불이어도 차가 없으면 그냥 길을 건넌다. 건널목이 아닌 곳에서도 길을 건넌다. 교통경찰이 없으니 단속도 없고 ‘무단횡단’이라는 말도 없다. 너무 위험한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운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행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약속’을 지킨다. 영국의 교통시스템에서 저자는 유럽의 이성을 보았다. 통제가 아니라 이성의 판단에 맡기는 교통시스템의 예는 또 있다. 교차로 가운데 둥글게 그린 단순한 선인 ‘라운드어바웃’을 따라 빙글 돌면서 교차로를 지난다. 신호등이 없지만, 모든 운전자가 양보에 익숙해서 사고는 거의 나지 않는다. 영국의 외국인은 도로의 좌측통행보다 라운드어바웃에 진입하는 것이 더 힘들다. 오래된 도로가 많아서 영국의 길은 매우 좁다. 구불구불한 2차선보다 뻥 뚫린 4차선이 더 좋겠지만 영국인은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한다. 그럼으로써 여전히 차가 아닌 사람이 중심일 수 있는 게다. 영국의 이성은 바로 희생과 양보 정신이다.
건축은 어렵다는 생각을 버려라
건축가이자 도시사회학자인 저자는 도시와 건축, 문화에 고루 관심을 가지고 직접 발품을 팔아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글로 옮겼다. 그곳에 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체험을 책에 담았다. 영국의 오래된 집을 소개하면서 200년이 넘은 자신의 집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준다. 《유럽 건축 뒤집어 보기》의 표정은 결코 근엄하지 않다. 유난히 건축 책은 두껍고 비쌌다. 쉬운 용어와 친절한 해설로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책 속에 배어있는 데다가 과욕을 부리지 않은 장정과 편집, 가격까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유럽 건축과 도시, 문화를 보는 더 나아가 우리 도시를 다시 보는 프리즘이 되기에 충분하다.
효형출판사 2007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