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도시재생의 지속가능한 동행

 김정후 박사 (런던씨티대학, ‘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 저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인류 역사에서 기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기업을 단순한 상인의 모임으로 볼 것인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다르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세 유럽의 상인 공동체인 ‘길드(Guild)’는 중요한 기준점이다. 길드는 화폐 경제와 함께 초기 형태의 기업이 등장하는 산파 역할을 했고, 이에 힘입어 16세기를 전후로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등에서 주식회사를 표방한 기업이 등장했다.

계급사회였던 중세시대에 기업이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사회’나 ‘공동체’가 필요했지만 중요한 고려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거대 자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하고, 시민의 주장도 커지면서 정부는 법을 통해 기업을 관리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 때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중요한 화두로 부상했다. 기업의 이윤 추구가 사회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사회를 위한 기업의 역할이 책임, 나아가 의무의 형식으로 부과된 것이다. 관심은 계속 증가했지만 20세기 전까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개념의 공유는 물론이고, 실천은 제한적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20세기 자본주의의 팽창과 함께 비로소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자본주의가 낳은 산업사회는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문제를 양산했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기업은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므로 기업이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세기 중반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원칙과 방법론이 정립되었다. 특히, 하워드 보웬(Howard R. Bowen)은 1953년에 출간한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 of the Businessman)』에서 기업인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웬의 주장은 기업경영의 관점에서 기업인이 사회에 접근하는 자세를 설명한 것이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리를 구체화했고, 이 중에서 아치 캐롤(Archie Carroll)은 1991년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 피라미드(Pyramid of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를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캐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경제적, 법적, 윤리적, 박애적 맥락으로 나누어 기업인이 따라야 하는 실천 모델의 형식으로 제시했다. 캐롤이 정립한 네 가지의 사회적 책임은 절대적 위계라기보다 기업경영에서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차원의 사회적 역할을 정립한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못한 가운데 ‘사회공헌(Social Contribution)’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고, 경우에 따라 두 개의 용어가 혼용되었다. 정확하게 정의하면, 사회공헌은 사회적 책임에 포함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주로 기업의 공익적 사회활동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자선, 봉사, 기부, 협찬 등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공헌에 담긴 목표나 범위와 별개로 두 가지 모두 기업과 사회의 건강한 상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공유가치 창출로 패러다임의 전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따른 일련의 자발적 활동이 낳은 긍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이 창출한 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므로 기업인에게는 무언의 압력이고, 수혜자인 시민에게는 기업의 생색내기로 비춰지곤 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압축성장을 거치며 비정상적으로 몸집을 불린 기업들의 윤리성과 신뢰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의 사회적 활동이 진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투자에 비해 효과가 미비하거나, 본질과 무관한 요식행위로 전락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계는 세계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공헌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교훈이 쌓이지 않은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기업의 권한은 여전히 막강했지만, 다행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는 훨씬 능동적, 전략적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과거와 비교해 유엔(UN)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포함한 주요 국제기구들이 인권, 노동환경, 공정성 등의 국제적 담론과 연계하여 글로벌기업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책임을 독려하는 단계로까지 논의가 확대되었다.

21세기를 전후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다시 한 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 동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기업이 얻은 이윤과 혜택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제부터는 기업경영과 사회발전을 위한 활동을 통합하려는 유연한 접근이다. 2011년에 마이클 포터(Michael E. Porter)가 제시한 ‘공유가치 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은 이러한 맥락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공유가치 창출은

기업이 추구하는 경제적 목표와  공동체가 추구하는 사회적 목표를

조화시키는 경영 전략이다.

공유가치 창출은 기업이 추구하는 경제적 목표와 공동체가 추구하는 사회적 목표를 조화시키는 경영 전략이다. 공유가치 창출은 기업을 경직된 틀로 구속하지 않고 사회와 적극적인 상생방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공감대를 이루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경영활동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접근이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윤 추구에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지녔다.  

공유가치 창출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오랫동안 긴장 관계 속에서 평행선을 달려온 기업과 사회가 출발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 진화된 형태의 ‘공유경제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기업과 사회가 지속가능한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갖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유가치 창출은 기업이 공공은 물론이고 공동체와 협력하여 진일보한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도시재생을 위한 기업의 역할: 런던과 코펜하겐 사례 

논점을 도시재생으로 좁혀보자. 20세기 후반부터 도시재생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 세계적으로 도시 분야의 핵심 화두로 부상했다. 그렇다면 도시재생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나아가 공유가치 창출은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있을까? 

쇠퇴한 도시를 재활성화하는 일의 시작은 원칙적으로 공공의 몫이다. 재활성화를 위한 선행 작업으로써 기반시설의 정비와 확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쇠퇴와 난제를 해결하는 도시재생사업은 대규모 예산과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전문적 영역이므로 민간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도시재생사업이 쇠퇴 지역의 물리적 환경개선을 넘어 사회경제적 자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밀한 경영적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부한 행정적 관행에 매몰되어 반복적으로 공적 자금을 낭비하기 십상이다.

공유가치 창출의 관점에서 기업은 도시재생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대도시가 직면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문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본격화되는 원인이었지만, 아직까지 경영 및 경제 분야에서 도시재생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나아가 공유가치 창출을 위한 원칙과 방법론을 체계화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이는 이론적, 실제적으로 진행 중인 화두임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대표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첫째, 넓은 의미에서 도시건축과 연관된 기업이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구현하는 것이다. 둘째, 개별 기업의 사업 영역과 무관하게 지역 활성화를 다각도로 염두에 두고 사업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것이다.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가지는 지속가능한 도시를 경영 목표의 한 축으로 간주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면 각각에 대한 사례를 통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런던시청과 공공공간을 중심으로 조성된 런던 브리지 시티 모습

첫째에 해당하는 사례는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템스강변 유휴지를 활용한 ‘런던 브리지 시티(London Bridge City)’ 재생사업을 주도한 ‘세인트 마틴스 부동산 투자그룹(St Martins Property Group)’이다. 세인트 마틴스 부동산 투자그룹은 템스강변에 방치된 15,000여 평의 부지를 복합개발하면서 장기임대로 런던시청을 입주시키고, 주변 일대에 녹지를 포함해 대규모 공공공간을 성공적으로 조성했다. 

런던 브리지 시티는 보편적인 부동산개발사업처럼 보이지만 21세기 런던에서 추진된 가장 교훈적인 도시재생사업 중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본 프로젝트는 철저하게 민간기업이 주도했지만 부지 곳곳에 마련된 공원, 광장, 산책로는 공공에서 추진한 사업을 능가할 만큼 세심하게 시민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지 내에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디자인한 런던시청은 공간적, 시각적 중심 역할을 하며 런던 브리지 시티 프로젝트의 방점을 찍었다. 런던시청은 최고 수준의 친환경 성능을 보유하면서 동시에 건물 내외부가 시민들을 위한 다목적 공공공간으로 조성되어 시청이 여느 박물관 못지않게 시민과 관광객이 찾는 방문지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에 런던 브리지 시티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자 런던시청을 중심으로 부지 전체를 연결하는 보행친화형 거리와 공공공간은 템스강변의 동서방향은 물론이고, 낙후된 남쪽 지역 일대의 광범위한 활성화를 자극하는 촉매가 되었다. 런던 브리지 시티 프로젝트는 부동산 기업이 복합개발사업과 도시재생을 연계하고, 이 일환으로 조성한 시청과 공공공간이 지역활성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미래지향적 대안을 제시했다. 

칼스버그 시티 부지 내에 기존 맥주공장 건물과 어우러져 완공된 코펜하겐 유럽학교 모습 

둘째에 해당하는 사례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중심부에 ‘칼스버그 시티(Carlsberg City)’ 재생사업을 주도하는 칼스버그 그룹(Carlsberg Group)’이다. 유럽을 대표하는 맥주회사인 칼스버그의 본산인 코펜하겐에는 1847년부터 100,000여 평에 달하는 대규모 부지에 맥주공장이 조성되어 2008년까지 160년 동안 운영되었다. 칼스버그의 역사가 곧 코펜하겐의 역사이고, 시민들도 칼스버그를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길 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   

칼스버그 공장이 프레데리시아 지역으로 이전한 후에 칼스버그 그룹을 중심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은 기존 공장 부지를 주거, 상업, 교육, 문화예술이 어우러진 복합단지로 개발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주목할 부분은 전면 재개발 대신에 기존 산업유산의 보존과 재활용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부지 내에 벽돌로 건립된 맥주공장을 최대한 보존하고, 구조와 안전 문제 등으로 부득이 철거한 경우에도 부재를 재활용했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벽돌, 콘크리트 그리고 각종 철재를 포함해 부지에서 수거한 재료의 96퍼센트 가량을 재활용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덴마크가 추구하는 친환경 원리를 구현하는데도 집중했다. 코펜하겐은 세계 최초로 2025년까지 탄소중립도시로의 전환을 선포하고 개별 분야마다 일관되게 실천 중이다. 칼스버그 컨소시엄은 칼스버그 시티 프로젝트가 코펜하겐의 탄소중립도시를 구현하는 핵심으로 간주하여 재료, 시공, 운영, 관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친환경 원리의 적용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칼스버그 시티 프로젝트에 포함된 개별 사안을 판단하는 일관된 기준이 친환경이라는 점은 무엇보다 높이 평가할 만하다.  

칼스버그 시티 프로젝트의 방점도 공공공간이다. 기존 공장 부지에 보존된 건물과 새롭게 건립된 건물은 공통적으로 높은 수준의 접근성과 녹지를 보유한 공공공간과 세심하게 연계되고, 부지 전체는 안전한 보행과 자전거를 우선으로 계획되었다. 

현재 칼스버그 시티는 주요 건물과 공간이 마무리되었고, 2024년 최종 완공을 목표로 남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칼스버그 시티는 철저하게 코펜하겐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호하면서 지속가능한 도시를 구현 중이다. 이를 통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서 코펜하겐의 면모를 다지고 있다.   

공유가치 창출을 위한 첨병으로서 도시재생

기업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담론은 초기의 사회적 책임에서 출발하여 공유가치 창출로 진화했다. 공유가치 창출을 경영에 도입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기업의 구성원이 강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끼고, 나아가 소비자의 윤리적 구매를 유도한다는 사실은 설득력이 있고, 이러한 추세는 계속 강화될 것이다.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 중인 공유가치 창출은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기보다 경쟁력을 강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기업의 경쟁력이 최종 생산된 제품과 서비스의 수준으로 결정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목적과 과정을 통해 해당 제품과 서비스가 제공되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 중인 공유가치 창출은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기보다 경쟁력을 강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는 전적으로 기업이 공유가치 창출을 바라보는 관점에 달렸다. ‘돈을 버는 방식’과 ‘나누는 방식’의 혁신을 거쳐 수익을 창출하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면 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앞서 사례로 설명한 런던 브리지 시티와 칼스버그 시티 재생사업을 주도한 세인트 마틴스 부동산 투자그룹과 칼스버그 그룹은 사회적 책임이나 공유가치 창출을 해당 사업의 전면에 내세우거나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유가치 창출의 교훈적 사례로 제시한 이유는 많은 면에서 두 기업이 추구하는 경제적 목표와 사회가 추구하는 공동체의 목표가 어우러졌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매 시기별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유가치 창출에 대한 담론을 전개해온 경영, 경제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를 주도하는 기업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한정하거나 제시하지 않았다. 특정 분야를 넘어 모든 기업이 적극적으로 사회와의 접점과 합당한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도시재생이야말로 공유가치 창출을 통하여 기업과 사회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동행할 수 있는 최상의 분야라 생각한다. 2007년을 기점으로 전 세계에서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이 50퍼센트를 넘어섰으므로 도시는 필연적으로 번영과 쇠퇴를 반복할 것이다. 또한, 도시는 기업 활동 자체와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펼쳐지는 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야를 초월해 기업이 추구하는 경영 전략에 도시재생이 뿌리내리고, 공유가치의 창출을 모색한다면 도시는 현재보다 훨씬 살기 좋은 장소로 발전할 것이다. 

출처: 서울특별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오피니언 칼럼_2021.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