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연재 2] 거리와 지하철역 이름이 도시의 역사가 되다

시각연재_김정후 박사의 도시일기∙도시읽기_2

거리와 지하철역 이름이 도시의 역사가 되다
김정후ㅣ런던대학UCL 지리학과
유럽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다. 그래서 유럽은 조상 덕에 먹고 산다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파리, 로마, 프라하처럼 도시 전체에 고전 건물이 즐비한 경우 이 같은 표현이 딱히 틀리다고 하기 어렵다. 오래된 건물이 많다는 것을 조금 더 정확하게 따져보면 ‘건립’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관리’의 측면이 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오래된 건물이 많다는 사실은 많이 만들기만 했다는 차원을 넘어 그 만큼 철저하게 보호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 막대한 관광 수입을 올리는 도시는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이다.

유럽에서 오래된 것을 잘 간직하고 후대에 전하는 전통은 비단 건물처럼 물리적 혹은 가시적 대상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거의 동일한 제목을 가진 흥미로운 책 두 권을 소개한다. 안토니 배세이 엘리스(Antony Badsey-Ellis)의 저서인 “거리 이름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What’s in a street name?)”와 시릴 해리스(Cyril M. Harris)의 저서인 “이름에는 무엇이 담겨있나?(What’s in a na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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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책은 영국에 존재하는 주요 거리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고, 두 번째 책은 지하철역의 기원과 의미를 설명한다. 한 마디로 두 권의 책은 거리와 지하철역의 어원을 설명한다. 두 권의 책에 소개된 각각의 이름은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경우도 흔하다. 그러므로 거리와 지하철역의 이름이 곧 살아있는 도시의 역사나 다름 없다. 두 권의 책에서 등장하는 몇 개의 사례를 들어보자.

먼저 거리 이름의 경우 ‘루드게이트 힐(Ludgate Hill)’은 로마인들이 영국으로 들어온 관문을 의미하는데 66년에 이를 건립한 ‘루드 왕(King Lud)’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런가 하면 거리 이름으로는 무척 독특한 ‘화이트홀(Whitehall)’은 16세기에 헨리8세가 지은 궁전에서 유래했다. 영국 왕실을 위해 건립된 화이트홀은 한 때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넘어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98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궁전은 일부만 남은 채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궁전이 자리했던 공간이 거리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홀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궁전은 사라졌지만 화이트홀이 자리했던 상징성을 남기기 위해서다.

‘다우닝 스트리트(Downing Street)’는 영국 수상이 거주하는 집이 자리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라 할 수 있다. 다우닝이라는 이름은 1730년에 이 거리를 개발한 ‘조지 다우닝(Sir George Downing)경’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우리로 치면 ‘김씨의 거리’ 정도라 할까! 자신의 이름을 붙인 거리에 수상들이 거주하니 다우닝 가문에는 더할 나위 없는 큰 영광임에 틀림없다. 10번지는 수상, 11번지는 재무부 장관, 12번지는 여당 수석 총무의 관저가 차례로 자리하니 모두가 이웃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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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지하철역의 이름을 살펴보자. 요즘 런던 템스 강변에서 활발하게 도시재생이 진행 중인 ‘버몬지(Bermondsey)’는 712년 무렵 이곳을 지배했던 앵글로색슨 귀족인 ‘버뮨데시(Bermundesi)’에서 비롯되었고,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언제나 초만원을 이루는 ‘옥스포드 서커스(Oxford Circus)’는 런던에서 북쪽의 옥스포드로 향한다는 의미에서 1682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해리가 마법 학교로 가기 위하여 사용했던 9와 3/4 플랫폼이 자리한 ‘킹스 크로스(King’s Cross)’는 1845년에 사거리에 세워진 ‘조지4세왕(King George IV)’의 동상에서 유래했다. 즉 조지4세 왕의 동상이 자리한 사거리에 건립된 지하철역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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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국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거리와 지하철역의 이름은 나름의 기원과 역사를 갖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딱히 거창하거나 특이한 이름이라기 보다 장소성과 정체성 혹은 상징성을 간직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거리와 지하철역의 이름을 하나의 소중한 유산으로 간주하여 오늘날까지 잘 계승해 왔다는 사실이다.

영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개발에 의해 계속해서 새로운 지역과 거리를 조성한다. 그러나 개발 과정에서 기존 지역에 존재하는 거리와 지하철역의 이름이 사라지거나 바뀌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거리와 건물에 붙여진 이름은 사람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이러한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단순히 거리와 지하철역의 이름을 전하는 것을 넘어 그 이름에 담긴 고유한 역사를 함께 전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크고 작은 수많은 행위와 사건이 쌓여 이루어진 거대한 탑이나 한 편의 서사시와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시에 존재하는 과거의 ‘흔적’과 ‘기억’은 도시의 풍요로움을 창조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전통건물을 소중히 보호하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해당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자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거리와 지하철역의 이름 또한 전혀 다를 바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들이 ‘스토리텔링’과 ‘브랜딩’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요즘처럼 도시간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이 작업을 마치 발명가가 발명품을 개발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은 바람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계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한 도시의 스토리텔링과 브랜딩은 해당 도시가 간직한 유·무형의 자산에 뿌리내릴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유·무형의 자산은 굳이 화려할 필요도 없고, 한 장소에 담긴 삶과 사회의 흔적으로 충분하다. 도시와 건축에서 ‘장소의 혼(Genius Loci)’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장소는 나름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는, 아니 지녀야 한다는 의미다.

부끄럽게도 우리나라에는 해당 장소와 무관한 생뚱맞은 이름이 넘쳐난다. 국적 불명의 외국어를 사용한 이름은 물론이고, 외국인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 표기도 넘쳐난다. 도시에 존재하는 장소에 붙이는 이름은 단순히 식별을 위한 ‘이름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이음표’임을 명심하자!

김정후 박사 201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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