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탱자로 전락하는 선진제도

공공건축가·한국형 유로판…
어수룩하게 수입한 제도는
골칫거리로 전락하기 쉽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선진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 필요한데 최근 도시 건축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을 감지할 수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무비판적으로 디자인을 직수입하는 데 혈안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고무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긍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막을 들여다보면 무조건 박수를 칠 수 없는 상황이다. 목표와 수립 및 시행 과정 등이 허점투성이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오세훈 전임 서울시장이 수립한 ‘공공건축가’ 제도에 대한 위촉식이 지난 2월에 거행되었다. 공공건축가는 서울시와 산하기관에서 발주하는 공공건축물의 기획 및 자문, 3억 미만 소규모 공공건축물의 경우 지명현상을 통해 설계를 담당하는 자격이 주어진다. 문제는 굳이 77명의 공공건축가를 선정해야 하는 이유-특히 서울시와의 관계-에 관한 지극히 당연한 비판과 지적에 적절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또한 서울시는 본 제도 도입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일본·프랑스·네덜란드·영국 등에서 공공건축가가 보편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납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그렇다 해도 서울시의 공공건축가 제도와 거리가 멀다. 따라서 공공건축가 제도가 취지를 살려 본궤도에 오르려면 상당한 보완이 필요하다.
한편 이달 초 국가건축정책위원회와 국토해양부는 한국형 ‘유로판’의 시행을 발표했다. 유럽에서 2년마다 시행되는 유로판은 40살 이하의 건축가들이 실제 부지와 특정 주제 아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인 개념과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실행하는 기회를 갖는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와 국토해양부는 한국형 유로판의 시행이 정부가 앞장서 젊은 건축사 발굴·육성에 나서는 것임을 강조한다. 유로판의 핵심은 젊은 건축가를 주축으로 타 분야 전문가들이 협업을 통해 시너지를 발산하고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이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건축사와 건축가의 모호한 경계, 국내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제도들과의 관계를 외면한 채 한국형 유로판이 경쟁력을 갖춘 젊은 건축사를 위한 플랫폼 구실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필요악으로까지 전락한 턴키입찰제도(설계·시공 일괄입찰)를 포함해 도시 건축 분야에서 우수한 선진제도가 골칫덩어리로 전락한 사례는 많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선진제도의 본질을 깊이있게 파악하지 않는 어수룩함과 우리 현실에 맞게 적용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로 든 공공건축가 제도나 한국형 유로판은 정부가 공공성의 수준을 높이고, 건축가(사)를 지원한다는 점에서 건축 집단 내부에서 환영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깊이있는 논의와 분석이 선행되지 않아 탱자가 돼버린 선진제도는 장사꾼 집단의 도구로 전락하고 건축계 내부의 반목과 불신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도시환경의 질적 수준은 낮아지고 이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도시학자 매슈 카모나는 좋은 도시 건축 제도가 유발하는 긍정적 파급효과는 몇몇 좋은 건축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말은 뒤집어서 말하면 나쁜 제도가 그만큼 부정적 파급효과를 낳는다는 의미다. 선진제도가 탱자로 전락하는 악순환을 막는 것이 곧 우리 도시와 건축이 풍요로워지는 지름길이다.
20120413  김정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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