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진단] 진정한 소프트 시티로 가기 위한 고찰

흔히 간과하는 대목은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선진 도시들의 훌륭한 정책이 수립 이후에도 끊임없는 토론을 거치며 수정을 거듭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적어도 지난 몇 년 동안의 상황으로 판단하면 서울시는 디자인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서울시가 전면에 내세운 이념은 ‘소프트 시티(Soft City)’다. 기능과 효율, 건설과 산업, 자동차 중심, 전통이 단절된 도시 패러다임을 ‘하드 시티(Hard City)’로 규정하고, 이를 개선할 대안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소프트 시티’는 1974년 영국의 조너선 레이번이 출간한 책의 제목으로 그는 당시 도시가 드러낸 문제를 비판하면서,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이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도시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소프트 시티에 담긴 지혜가 도시의 합리적 발전에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시공간의 차 이를 떠나 서울시가 현재 직면한 도시 문제에 대처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패러다임으로서 소프티 시티를 부각시킨 대목은 적절했다.
레이번을 포함해 여러 도시학자가 지적한 소프트 시티의 본질은 도시의 고유한 정체성과 역사에 뿌리내리며, 사회의 본질적 특성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데 있다. 창의적인 도시 디자인은 이를 성취하는 효과적 수단이다. 그러나 소프트 시티를 표방한 서울시가 내세운 원칙과 정책적 방향을 살펴보면 예상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첫째, 하드 시티가 낳은 문제로 나열한 내용들은 현대도시가 겪는 보편적 현상이다. 즉 서울이 지닌 특수한 상황에 집중한 문제인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그에 상응하는 소프트 시티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혼재한다. 예를 들어 자전거 속도를 음미하는 도시, 재미있고 즐거운 창조적 도시, 콘텐트 중심의 소프트웨어 도시, 움직이는 아메바형 도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필자는 이 도시들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고, 왜 소프트 시티인지도 판단할 수 없다. 결국 서울이 내세운 소프트 시티는 서울의 필요와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와는 무관하게 각기 다른 이상적 도시 개념의 백화점식 나열에 불과하다.
둘째, 소프트 시티를 실현하겠다면서 ‘비우는, 통합하는, 더불어 하는,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4대 전략으로 제시한다. 문제는 개별 전략의 경계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소프트 시티라는 목표를 실현할 구체적 전략이 거의 없다. 지속 가능한 디자인은 단순히 환경적 맥락만이 아니라 공간적•사회적•제도적 개념으로 당연히 통합과 참여를 전제로 한다. 또한 비우고 통합하는 디자인은 공공 공간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방법으로 유사한 개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소프트 시티의 핵
심으로 언급한 인간 중심의, 창조적, 맥락적 도시를 어떻게 실현할 계획인지 그 구체적 전략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추상적이고, 광범위하게 나열한, 도시 이념을 아우르지 못하는 부실한 전략이다.
셋째, 4대 전략은 다시 개별적 디자인 개선 방향으로 이어진다. 각기 다른 4대 전략이 무색하게 모두 공공 공간, 공공 건축물, 공공 시설물, 공공 시각매체, 옥외 광고물 등의 다섯 가지로 고정해 개선 방향을 설명하는데, 세부 실행 방향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빈약하고 일부는 핵심을 벗어난 내용도 있다. 예를 들어 비우는 디자인은 오로지 공공시설의 내용만을 다룬다. 그런가 하면 지속 가능한 디자인 전략에 포함된 옥외 광고물 개선 방향의 경우는 ‘규격과 수량 축소로 도시 경관과의 조화’라고 설명한다. 그야말로 본질과 맥락에서 벗어난 논리의 비약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그러면 현재 서울시가 수립한 ‘디자인 서울’ 정책의 문제를 개선하려면 무엇을 시급하게 논의해야 할까? 종합적 맥락
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현재의 도시 환경을 파악하는 시선의 문제다. 위에서 언급한 서울시의 디자인 정책은 도시 환경을 철저히 개선의 대상으로만 파악한다. 이러한 부정적 접근은 경직된 가이드 라인을 통해 획일화된 공간과 풍경을 만드는 데 집중하도록 만든다. 당연히 서울이 지닌 가치와 가능성을 (재)발견할 여력과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둘째, 디자인을 보는 편협한 접근이다. 디자인 서울의 핵심은 ‘디자인’이 아니라 도시인 ‘서울’이다. 이 미묘한 지향점의 차이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아름답기만 한 디자인을 넘어선다는 구호는 있으나, 어떻게 그것을 성취하겠다는 정책적 대안은 없다. 디자인을 여전히 산업 디자인이라는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로 한정시킴으로써 과도한 장식과 표현이 난무하는 상황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시각적 개선에 천착한 국적 불명의 공공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아무런 비판 없이 도시 디자인을 대체해 정책의 최상위에 자리 잡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셋째, 도시 디자인 어젠다의 선택과 집중이다. 현대 도시를 성공적으로 이끈 도시 어젠다는 수없이 많으며, 새로운 어젠다가 끊임없이 출현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다양한 어젠다를 한 도시가 모두 성취하기란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선택과 집중,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분명한 한두 개의 지향점과 이에 수반된 몇 개의 치밀한 전략이 일정한 위계 아래 수립돼야 한다.
처음에 언급했듯 하드 시티에서 소프트 시티로의 방향 전환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를 실현할 도시 정책과 그에 따라서 지난 몇 년간 서울에 등장한 결과물은 또 다른 형식의 하드 시티로 돌아가는 오류를 범했다. 흔히 간과하는 대목은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선진 도시들의 훌륭한 정책이 수립 이후에도 끊임없는 토론을 거치며 수정을 거듭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서울시가좋은 도시 정책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서울시는 이제 막 도시 정책의 부재를 벗어나 출발점을 만들었을 뿐이다. 경계해야 할 점은 허술한 도시 정책을 과신한 나머지 이를 갈고닦는 데 소홀한 것이다. 도시정책은 탐험가의 나침반과 같다. 10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거대 도시 서울이 허술한 나침반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어리석음은 겪는 이와 보는 이 모두를 불안하게 한다.
월간 중앙 201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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